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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칼럼 : 12월] 말과 약속 그리고 관계

우리는 종종  ‘말’과 ‘관계’가 가지는 힘을 간과하곤 한다. 손을 쓰는 술기라고는 없는, 다른 과 의사와 달리 오로지  ‘말’로 먹고 사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들도 종종 그럴 때가 있다.

 

최근 조증 증상을 보이는 젊은 남자 환자가 입원을 한 적이 있다. 평소 부모에게 말대꾸 한번 하지 않던 환자는 부모에게 욕을 하고 동서양 철학을 집대성 하겠다며 잠을 자지 않는 등의 증상을 보였다.  입원을 하면 의사들은 약물 치료를 하면서 환자의 증상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 이 환자는 초발 조증 환자들이 그렇듯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이 병이라는 인식, 소위 ‘병식’이 없었다. 자신은 병이 없으니 퇴원을 하겠다며 난리였다.  

 

보통 약물을 쓰고 일정 기간을 기다리면 환자의 증상이 가라앉고 퇴원요구도 잦아 들게 된다. 그러나 이 환자는 입원기간이 상당히 지나도록 집요하게 퇴원요구를 하였다. 또한 자신이 발병한 이유가 어머니의 자신에 대한 과도한 간섭과 통제 그리고 언어적 폭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대학생인 자신의 귀가 시간이 조금만 늦어져도 온갖 입에 담지 못할 욕들을 문자로 보내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환자의 이런 주장을 조증환자의 과장으로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나중에 부모님과의 면담을 통해서 실제 어머니의 통제적이고 강박적인 노이로제를 확인할 수 있었다.

 

환자는 입원기간이 늘어나면서 퇴원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욕을 하고 주먹으로 벽을 치는 등 의료진과 타 환자들을 위협하였고 이로 인해 격리치료를 받는 날들이 늘어났다. 덩달아 투여 약물이 늘어났고 환자는 늘어난 약물에 대해 심한 분노 발작을 보이곤 하였다. 약이 늘어나도 환자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나 치료진이  환자의 분노를 잘 들어주는 날에는 분노 발작이 덜하거나 없는 날도 있었다. 이런 관찰을 통해 환자의 불만과 폭력을  ‘조증’이라는 증상으로만 치부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전히 증상이 심했던 어느날 나는 환자에게 향후 일주일간 폭력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 스스로 분노를 자제 할 수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면 그 뒤 외출이나 외박을 허용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보통 조증 환자들은 하루도 충동이나 감정을 자제하기 어렵기 때문에  반신반의 하면서 내린 ‘약속’이었고 큰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후 극에 달했던 폭력적인 언행이 멈추었고 약속한 일주일간 한번도 격리치료를 받을 만한 일을 만들지 않았다. 이후 치료진의 의심은 믿음으로 바뀌었고 환자는 약속한대로 외박을 잘 다녀왔다. 이후 믿음에 대한 화답이라도 하듯이 환자는 그동안 자신이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고 퇴원 요구가 너무 급했다는 ‘병식’이 생겼다.

 

대형병원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우리는 너무 많은 환자를 급하게 보고 약물치료에 의존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주고 받는 말, 약속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에서 생기는  믿음과 같은 것들이 아무것도 아니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빵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성경구절을 꼭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한마디 말과 사소한 관심이 주는 커다란 효과를 일상에서 경험하며 산다. 그런 효과가 정신과 환자에게 통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를 우리는 환자를 통해 배운다. 

 

 

서울아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부교수 신용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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