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진단을 내릴 때마다 강성한 교수는 이야기한다. “100% 보장할 수는 없지만 기회는 충분합니다. 우리 최선을 다해봅시다.” 급성 골수구성 백혈병이나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은 강도 높은 치료가 이어지는데 완치율은 소아에서 가장 흔한 급성 림프모구성 백혈병보다 떨어진다. 강 교수는 긴 입원 생활과 반복되는 위험 상황에서 환아와 부모를 이끌고 가야 한다. 때론 임종 과정이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의 인생이라는 퍼즐에서 한 조각을 맡았다고 생각해요. 그림의 빈 곳이 생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위기를 함께 넘으며
열여덟 살에 오토바이 사고로 친구를 잃었다. 큰 충격과 함께 죽음에 관한 질문이 찾아왔다. 조금 더 의미 있는 삶을 고민하면서 의대에 진학했다. 처음엔 의대 공부가 와닿지 않아 방황하기도 했다. 인턴이 되어서야 비로소 일의 재미와 만족감을 찾을 수 있었다.
“잘 치료되어서 환자가 일상과 행복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누군가의 인생에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구나’라는 기분이 들었어요. 먼 훗날 죽기 전에 제가 치료한 환자들이 훌륭한 사람이 되는 걸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소아청소년과를 선택했죠.”
강 교수는 항암과 골수 이식, 조혈모세포 이식 등의 치료 결정을 내리고 진행한다. 뚜렷하게 입증된 신약이나 표적 치료법이 별로 없는 분야다 보니 매일같이 환자들의 위기 상황을 함께 넘는다. 그 과정에서 ‘울보 의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장기간 만난 아이들이라 모두 각별하게 느껴져요. 아이들의 상태에 따라 제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하죠. 이성과 감성을 유연하게 오가야 하는 일인데 말처럼 쉽지 않아요.”
태어난 지 2주 된 아기가 응급실에 온 적이 있다. 같은 시기에 같은 증상으로 첫째 아이를 잃었던 부모는 지방에서부터 황급히 달려왔다. 검사 결과는 혈구탐식성 림프조직구증이었다. 계속 열이 나고 간 기능과 모든 수치가 떨어졌다.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결정에 집중했다. 아이는 매일의 위기를 넘기고 항암 치료와 이식까지 무사히 견뎠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느꼈어요. 사실 제가 하는 치료 결정이나 처방은 일부분입니다. 주사나 약을 조제하고 멸균처치를 하는 단계마다 모든 의료진이 안전한 시스템을 이루고 있죠. 그건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에서 나오는 노력이라고 봐요.”
부모의 마음이 담긴 치료
강 교수는 하루 두 번 병동을 찾는다. 치료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환아들과 보내는 시간이다.
“어느 병원이든 해줄 수 있는 치료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보내는 걸 거예요. 아이들에게 충분히 집중하는 의사가 되고 싶습니다.”
회진 때는 아이들의 우울감이나 정서적인 어려움도 주의해서 살핀다. 그 때문인지 환아들도 서슴없이 그에게 다가와 마음을 터놓는다. 병원에 오는 걸 죽기만큼 싫어하던 아이가 병원에 오는 날만 기다린다는 부모의 제보도 종종 듣는다.
“네 자녀를 키우면서 배운 게 있습니다. 백지 상태에서 아이들을 바라봐야 이해와 소통이 시작된다는 거죠. 또래와 나눌만한 일상적인 대화나 농담부터 쌓아야 꿈과 고민을 나누는 관계가 되고 치료 과정과 임종에 관한 다소 부담스러운 주제도 다룰 수 있어요.”
틈틈이 내는 시간과 노력은 치료를 위한 예열 과정인 셈이다.
“제 셋째 아이도 발달장애가 있습니다. 부모로서 느끼는 미안한 감정과 속상한 경험들이 환아 부모님들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마음까지 돌보는 완화의료
태어나서부터 백혈병과 폐 이식, 림프종 등으로 15년간 치료받아온 환아를 몇 달 전에 떠나보냈다. 급속히 악화되는 바람에 이별을 준비할 새가 없었다. 환아의 부모도 한동안 자녀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치료 측면에서 더 해줄 건 없었어요. 마지막 순간을 편안하게 돌봐주지 못한 게 두고두고 아쉬운 거죠. 어린아이의 임종을 준비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지만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려면 꼭 필요한 치료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지난해 신설된 소아 완화의료팀에서 강 교수는 간호사, 사회복지사와 함께 아이들의 정서적인 지지를 돕고 있다. 임종 과정에 있는 아이들에게 의료 결정이나 치료 상담 등의 필요한 도움을 찾아 제공한다. 말기 환자에 국한하지 않고 장기간의 병원 생활로 사회적인 경험이 다소 부족한 환아들에게 일상을 만들어주기 위한 놀이 치료 프로그램 등도 진행한다.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어요. 이러한 과정이 임종 후 환아 가족에게도 빠르게 일상을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요. 곧 중증 소아 재택의료팀도 출범할 계획입니다. 언젠가 데이케어센터처럼 중증 환아와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갖춘 공간도 만들고 싶어요.”